Thorin×Thranduil
Unknown Tale
아들아, 네가 언젠가 드워프라는 족속을 만나게 된다면 그들을 스쳐 가는 바람 속의 먼지 정도로만 여기거라. 혹여나 그들을 친구, 아니면 동료라는 관계에라도 집어넣지 말기를 바란다. 연인 따위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 그들은 고집불통에다가, 약속 따윈 지키지 않는 무뢰한이란다. 응? 드워프들이 약속을 어긴 경험이 있느냐고? 아들아,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우리의 멀고 먼 친척이 들려준 이야기란다. 산 밑에 있던 어느 드워프 왕국. 그곳에는 아름다운 황금과 보석이 넘쳐난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그 진귀한 보물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의 먼 친척은 그 왕국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어린 드워프 왕자를 만났단다. 그는 그의 할아비나 아비보다 맑고 깊은 눈을 가졌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요정은 그 눈 너머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우리의 친척은 알아볼 수 있었단다. 그 왕자가 여태껏 봤던 드워프들과는 다르다는 걸. 그리고 자신도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지. - 물론 그것을 쉽게 표현하진 않았다.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걸 수치스럽게 여겼거든. (아버지처럼요?) - ……. 하지만 불행하게도, 드워프란 족속이 참으로 눈치라는 게 없어서 우리의 친척은 그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 혼자 속병을 앓아야 했단다. 여러 차례 그 왕국을 방문해도, 산길과 동굴 안을 말없이 산책만 할 뿐이었지. 그는 내, 아니 우리 친척이 그곳을 계속 방문하는 게 그들의 보석을 탐해서라고 생각했는지 갈 때마다 보석을 한 상자씩 선물해주었지. 그것이 목적은 아니긴 했지만, 우리의 현명한 친척은 그것을 마다하지는 않았어. (어? 그것이 아버님 방에 있는 그 보석함들인가요?) ……. 그중 일부만 내게 나누어 준 것일 뿐이다, 아들아.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의 친척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 어리석은 드워프에게 그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일깨워줘야만 했어. 여느 때처럼 산 밑 왕국을 이전에 이어 구경시켜주고 있었다. - 그곳은 너무나도 넓고 깊어 하루 이틀로는 턱없이 부족했지 - 나의 요청으로 다른 수행원들 없이 우리 단둘이 지하 깊은 곳의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는데, 그때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우리의 친척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어두웠던 동굴이 밝아질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보석이었어. 저 유명한 스로르의 아르켄스톤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쁘진 않았어. 그리고는 그가 이렇게 말했지. '나 스라인의 아들 소린, 그대의 고귀함에 어울리는 이 보석을 선물하오.' 우리의 친척은 뛸 듯이 기뻤지만, 티 내지 않았단다. 애써 화색을 감추고 한번 거절했지. 드워프 왕자는 당혹스러워했고 그 모습이 재미있어 그에게 계속 농을 던졌어. '나의 고귀함이라니. 그러하다면 아르켄스톤 정도는 선물해야 하는 것 아니오? 스라인의 아들 소린.' 그 말에 아까보다 더 당혹스러워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났더랬지.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주겠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엘프는 고개를 갸웃했고, 드워프는 말을 이었어. 아르켄스톤은 지금 조부의 소유라 안 되고 언젠가는 자신이 물려받게 될 거라고. '그때, 반드시 그대에게 선물하겠소.' 그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어. 그제야 우리의 친척은 깨달았지. 자신 역시 그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표현하는 방법 따위 모르는 드워프는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매번 만남 때마다 내줌으로써 마음을 대신했던 거야. 오히려 아무런 표현도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건 자존심과 오만함만 가득한 우리의 엘프였지. 떨려오는 심장의 울림을 애써 눌러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어. '약속하는 겁니까?' 왕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어. '약속하오. 두린 가문을 걸고 맹세하오. 당신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보석과 바꿔도 모자라오. 일단 이것을 간직해주시오. 맹세의 증표이니.' 그는 목걸이로 된 그 보석을 내밀며 말했단다. '내가 왕이 되면 제일 먼저 그대라는 보석을 나의 성에 들일 것이오. 그러면 아르켄스톤도, 다른 보물들도 모두 그대 것이오.' 우리의 친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뺨 위를 흐르고 있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어. 다른 종족 앞에서, 그것도 드워프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하지만 그건 그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이미 드워프는 엘프에게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다 고백했기에, 비겁하게 숨을 수가 없었거든. 이제 둘은 서로의 모든 걸 온전히 드러내 보인 거야. 엘프의 손을 보며 목걸이를 건네받기를 기다리고 있던 드워프는, 우리의 엘프가 손 대신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자 놀래서 눈이 동그래졌단다. 엘프가 무릎 꿇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거든. 그 순간 우리의 친척에겐 수치심이고 뭐고 없었어. 오직 존경과 사랑뿐이었지. 그가 고개를 숙이자 드워프 왕자는 그의 목에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어. 그 보석의 빛에 의해 엘프의 얼굴은 더 환하게 빛났지. - 꼭 보석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야 - 우리의 친척은 감사와 사랑과 서약의 의미를 담아 그의 이마에 입 맞추었어. (아름다운 이야기 같은데요, 아버지?) 아름다운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는단다, 아들아. 다음에는 추악한 배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오늘보다는 더 진한 포도주가 필요할 것 같구나. 밤이 늦었으니 그만 잠자리에 들거라, 레골라스.
아들아, 그런 기대감 가득 머금은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말아라. 네가 기대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찰나일 뿐이다. 한편 배신과 분노에 관한 이야기는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이지. 아름답지만 짧은 그 이야기는 그 짧았던 시간만큼이나 강렬하여 배신이 주는 상처 또한 더더욱 깊었단다. 우리의 먼 친척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흠뻑 취해 눈이 멀고 귀가 먹을 지경이었단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드워프 왕자의 말들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언어로 들려왔고 그의 거친 손은 어느 엘프의 숨결보다도 부드럽게 느껴졌다고 하더구나. 우리의 친척은 엘프로서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었단다. 그가 먼저 그렇게 했기 때문이지. 그는 돌려 말할 줄 모르고, 숨기려는 것이 없었어. - …그때는 그렇게 믿었었지 - 그래서 그는 어린 드워프 왕자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기로 했지. 바로 자기 자신 말이야. 우리의 엘프 친척은 자신의 육체를 지키는 데 모자람이 없이 해왔어. 하지만 더는 그런 것이 소용없다고 느끼게 된 거지. '이미 나의 정신과 영혼은 그의 것인데 육체 따위 뭐가 소중하지?' 사랑이라는 수렁에 빠진 엘프는 그렇게 자신의 전부를 드워프 왕자에게 바쳤단다.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됐지. 너무 깊은 수렁에 들어와, 다시 올라갈 끈을 놓쳐버린 거야. 그들에게 불신이 싹이 트기 시작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야.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왕자의 성에 방문해서 밀회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할아버지 스라인과 마주쳤지. 왕자는 자신의 연인에게, 가족들에겐 기회를 봐서 얘기할 테니 당분간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해놓은 상태였어. 우리의 친척은 연인의 말에 순종했지만, 그의 할아비는 꽤 무례했어. 자신의 왕국에 계속 방문하는 이유가 자신의 보물을 노리기 때문 아니냐고 대놓고 따져댔단다. 우리의 엘프는 연인의 조부에게 무례해지고 싶지 않았으나 화를 참을 수 없었어.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친척도 꽤나 성질 있는 엘프였거든. (아버지처럼요?) ……. 그는 스라인에게 말했어. '만약 그렇다고 하면? 나의 출입을 막을 텐가? 걱정되면 경비를 더 삼엄하게 하게. 막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모르긴 해도 스라인 역시 그 태도에 매우 분노한 것이 틀림없어. 그를 보는 눈빛에서 불을 뿜을 정도였다고 하더군. 하지만 우리의 엘프는 신경 쓰지 않았어. 그만이 갖고 있던 높은 자신감과 연인에게 갖고 있는 깊은 신뢰 덕분에 무서울 게 없었거든. 하지만 그때 그가 알았어야 해. 그래 봤자 자신의 연인은 왕가에서 아직 풋내나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에겐 약속을 지킬 아무런 힘도 없었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둘은 만나는 날들이 현저히 줄어들었지. 서신에 답도 잘 돌아오지 않고 성으로 찾아가도 왕자를 알현할 수 없다는 말들만 돌아올 뿐이었어. 하지만 우리의 불쌍한 친척은 끝까지 믿었지. 조부가 그들 사이를 방해하기 때문일 거라고. - 연인들이 흔히 하는 착각에 빠진 거지 - 그들은 힘겹게 다시 만날 수 있었어. - 왕자의 사촌인 발린이라는 드워프가 도움을 주었지 -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들 사이엔 왜인지 모를 벽이 있었어. 엘프는 눈치챘어. 조부가 놓은 간교한 계략에 고지식한 왕자가 빠졌다는 걸. '조부께서 당신이 우리 왕국의 보물 때문에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한 거라더군.' '진정 그 말을 믿는 것 아니겠지? 당신이 우리 관계를 제대로 설명했어야지.' '했는데 전혀 들으려고 하시질 않소. 아버님까지도 같은 편이 되셔서는. 어떻게 했기에 조부께서 저리 화가 나신 거요?' '그가 나를 먼저 모욕했소. 당신은 내가 당한 모욕 따윈… 신경도 안 쓰는 건가?' '당신이 우리 왕가를 먼저 모욕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의 말에 우리의 친척은 얼이 빠진 듯했어. 온몸에 흐르는 피가 식고,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지. 이런 자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쳤단 말인가. 우매한 자여, 엘프라고 할 수도 없는 자여. 드워프와 정을 통하더니 그처럼 눈을 흐리고 귀가 먹었구나. '그래서 말인데,' 드워프 왕자는 잠시 침묵 후에 입을 열었지. '그대에게 주었던 목걸이를 돌려받고 싶소.' 하, 이자가 자신이 줬던 것을 돌려받으려 하는구나. 온몸과 마음을 줬던 나는 어떻게 돌려받아야 하는 거지? 언약의 증표를 돌려달라는 것은 즉 약속의 끝을 말하는 것 아니겠느냐? 우리의 친척은 목으로는 울분이 터져 올라왔지만, 겨우 참아냈단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까진 막을 수 없었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단다. 분노와 배신의 눈물이었어. 너무나 쉽게 사랑의 맹세를 하는 드워프 족속이 혐오스러웠고 또 그 말에 넘어간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이를 꽉 물고 두 눈에서 쉬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맞으며 스스로 불러온 치욕의 순간을 겨우 인내하고 있었지. 끝내자. 모두 다 끝내버리자. 엘프의 긴 생 중에 지금 이 시간은 정말 한순간의 찰나일 뿐이야, 그리 되뇌며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잡았지. 그것을 잡아 뜯으려는데, 그 목걸이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왕자의 눈을 보았어. 그 목걸이가 연인-이었던 자-의 목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지. 그 눈을 보자, 악에 받친 우리의 친척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 싫어졌어. 이미 그들의 사랑은 틀어졌는데, 왜 자신만 모든 걸 잃어야 하지? 우리의 친척은 목걸이를 쥔 손을 내려놓았어. '아니.' 왕자는 미간을 찌푸렸어. '돌려주지 않을 거야. 나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째서인지 왕자는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어. '제발, OOOO. 그걸 얼른 풀어.' '그 거짓 가득한 입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 거짓과 위선만 내뱉는 그 입에서 나의 이름을 들으니 나조차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다. 그러니 제발 그 입을 닥쳐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왕자는 물러서지 않았지. '날 어떠한 말로 모욕해도 좋소. 어떤 욕을 들어도 부족한 자이니까, 나는. 그러니 제발 마지막 부탁 하나만 들어주오. 목걸이를 내게 줘.' 그는 알 수 없는 말로 이해 안 되는 요구만 해댔지. 지금 이 상황에 목걸이에만 집착하는 건가? '당신이 간절히 청할수록, 난 더욱 들어주기 싫어진다는 걸 모르겠어? 이 어리석은 자여. 그대를 어떻게 지금까지 나의 연인으로 여기고 살을 섞고 지냈던 거지. 이리도 무지몽매한데.' 엘프의 단호함에 왕자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어. '마음대로 하시오. 단, 그것에 건 우리의 맹세는 더는 없는 거요. 그 목걸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소.' '당신이 이리도 쉽게 약속하고 쉽게 약속을 깨는 자라는 걸 왜 몰랐지? 그걸 알았다면 이 목걸이를 받지도 않았을 텐데. 그때, 알았어야 해……. 이 목걸이를 줬을 때, 의심했었어야 해. 언약을 깨는 지금 당신 모습이 어찌 이리도 당당한지.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의 친척은 마지막 남은 짧은 희망의 끝을 겨우 붙들고 남은 목소리를 겨우 짜냈어. 감정이라는 게 남아있는 최후의 목소리. 드워프 왕자는 눈물범벅이 된 엘프의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올려보다가 야멸차게 고개를 돌렸어. 그 뒷모습에 우리의 친척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실감했지. 모든 것이. 그들이 나누었던 수많은 사랑의 언어들, 함께 보낸 낮과 밤, 꿈꾸었던 미래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이 난 거야. 슬픈 이별 따위도 아니었지. 그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분노만이 남아, 애초부터 믿음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던 듯한. 그래서, 이제 이야기의 끝이 왔다. 아들아, 그 이후로 영영 둘은 만나지 않았느냐고? 아니 그 후에 마지막으로 그들은 딱 한 번 만났지. 멀리서 서로를 바라봤어. 드워프의 왕국은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어. 왕국이 공격당한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의 친척은 군사를 이끌고 산 위로 올라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러 갔어. 그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한때 자신의 왕국 될지도 몰랐을 그곳의 끝을 보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치욕과 수모를 안겨준 왕가의 몰락을 지켜봐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드워프들은 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던 수많은 보물을 뒤로하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지.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어. 그의 옛 연인. 그 왕국을 약속했던 어린 왕자. 한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자. 하지만 그의 비참한 모습을 봐도 동정심이 들진 않았어. 바로 그가 자신을 처참하게 짓밟고 헌신짝처럼 버렸기 때문에. 눈이 마주치자 그는 놀랍게도 엘프들에게 손을 흔들며 도움을 청했어. 엘크를 타고 있던 우리의 친척은 놀라움에 눈이 커졌지. 지금 네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야? 우리의 친척은 이미 '마음'이라는 걸 잃은 상태였어. 바로 '그'가 그렇게 만들었지. 그날, 마지막으로 눈물을 다 쏟아낸 엘프에겐 동정도 자비도 남아있지 않았어. 그렇게 만든 당신이, 지금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야? 당신네 족속은 끝까지 답이 없구나.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두뇌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 심장도 없어.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죽어도 내게 손 흔들지 못할 텐데. 참으로, 편한 족속이로고. 그렇게 나, 아니 우리 친척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했지. 그때만 생각하면 통쾌해서 삼일 밤낮을 웃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진짜로 모든 것이 끝났지. 모든 것이. 그러니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아들아. 훗날 드워프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오거든, 적으로 둘지언정 친구나 동료로는 사귀지 말길 바란다. 먼 친척이 우리에게 준 교훈을 죽을 때까지 잊지 말거라. 부디, 잊지 말거라.
레골라스는 조심히 스란두일의 손에서 술잔을 빼냈다. 그리곤 바닥을 향해 늘어진 몸을 겨우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그러다가 그의 옷 속에서 빠져나온 무언가를 발견했다. 레골라스는 아버지에게 이런 눈부신 목걸이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목걸이를 다시 품 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는데 아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줄기를 보았다. 레골라스는 손을 뻗어 그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ㅅ…ㅗ… 리… ㄴ……" 스란두일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만 쉬세요, 아버지." 레골라스는 아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는, 침실 문을 닫고 나섰다.
<번외>
엘프 이야기를 해달라고? 별로 할 얘기가 없는데……. 아, 알았다, 알았어. 떼쓰지 마. 그럼,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들려주마. 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일 뿐이야. …… 오래전, 어느 드워프와 엘프가 사랑에 빠졌단다. 그렇지, 필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정말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진짜 그랬단다. 둘은 미래까지 약속했지만, 사실은 그들은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행복하기 바빴기 때문에 먼 미래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지.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지. 그들이 꿈꿨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어. 왕자였던 드워프는 (와! 삼촌이랑 똑같네요?) 그래, 왕자였던 드워프는 자신의 왕국을 엘프에게 약속했지만, 아직 살아계신 조부와 부친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었지. 자신이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어.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조부와 부친은 당장 그만두라고 했지. 왕자는 차라리 왕국을 포기하겠다고 했지. 그렇게 되면 엘프에게 했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연인은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지. 조부는 엘프의 목숨을 놓고 손자에게 협박했어. 둘의 관계를 일찌감치 알고 있던 부친이, 이미 손을 써뒀다는 거야. 그들의 왕국에는 많은 보석이 있었는데, 그중에 '저주의 돌'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석이 있었지. 그 보석을 반으로 가르면 두 배로 더 아름답게 빛나며, 대신 다른 한쪽으로 나머지 한쪽을 지닌 자에게 저주의 주문을 걸 수 있는 그런 보석이었어. 그 보석을 미리 왕자의 눈에 들도록 해놓은 거지. 누구나 한눈에 보아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운 보석이었거든. 어느새 그 목걸이는 엘프 연인의 목에 걸려있었지. 부친의 치밀한 계략이었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자는 절망했어. 그에게 과연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이별과 죽음이라는 잔인한 선택지 앞에서.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원망하며, 아비와 조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어. 비겁했지만, 왕자는 자신의 연인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거짓말을 동원해야 했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연인의 말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어. 그 어떤 말들도 그의 영원한 침묵보다는 나으니까. 하지만 그 목걸이, 그 목걸이가 그의 목에 걸려있는 한 왕자는 계속 불안과 걱정 속에 살아야만 했어. 그것이 언제든지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거나, 영원히 협박의 도구로 사용될 테니까. 그것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엘프에겐 이해시킬 수 없는 일이었지. 허공에 흩어진 사랑의 서약마저도 부족해서 그 증거까지 앗아가려 하니. '날 어떠한 말로 모욕해도 좋소. 어떤 욕을 들어도 부족한 자이니까, 나는. 그러니 제발 마지막 부탁만 들어주시오. 목걸이를 내게 줘.' 연인에 대한 걱정에 간절히 청했지만 이미 깊은 분노로 이성을 잃은 연인은 다른 뜻은 헤아리질 못했어. 할 수 없이 드워프는 돌아서야 했어. 자신이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 한 그는 안전할 테니까. 그는 아마도, 전 생애를 바쳐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를 구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최소한 그가 그렇게라도 자신을 잊지 않아 주었으면, 왕자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어. 비록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래서 둘은 다시 만나지 못했나요?) 웃기게도 말이지, 본디 애초부터 그럴 운명이었던 것인지 그들은 서로 원망하게 되었단다. 왕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이내 잊어버리고, 위기에서 자신의 종족을 모른 체한 엘프에게 화가 났지. 자신 때문에 자신의 종족들이 처한 불행까지 등 돌려버릴 줄은 몰랐던 거야.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에 대한 원망의 깊이가 실제로 어느 정도였는지 깨달은 거지. 하지만 그 당시엔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이런 생각뿐이었어. 드워프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자신의 악행은 이내 잊고 또 다른 증오만이 남아 그것을 힘으로 살아남게 되었어.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서로에 대한 원망뿐이지. 이게 이 이야기의 끝이란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분노만 남은 이야기. (…삼촌은 엘프 본 적 있어요?) ……있지. 맹세하건대 필리야, 내가 본 엘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단다. 자,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자. 킬리는 어느새 잠들었구나. 다시 말하지만 필리, 이 이야기는 어디선가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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